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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의 나라 조선....불교의 나라 고려. 신라. 그들은 왜 쓰러지게 되었을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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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의 나라 조선....불교의 나라 고려. 신라. 그들은 왜 쓰러지게 되었을까......?

기술사 K 2024. 9. 18.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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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라는 국가는 한반도에 존재했던 한민족의 마지막 왕조국가였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근대화와 침략으로 인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는데요.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조선이 망한 진짜 이유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득권층인 양반들의 권력독점

조선 건국 당시 핵심세력은 이성계를 지원하던 '신진사대부'들이었습니다. 또한 '신진사대부'들은 고려 말기 권문세족에 대항했던 세력이기도 했는데요. 조선이 건국되고 '신진사대부'라고 불리는 양반들이 권력을 독점하면서 권력의 재분배는 조선 말기까지 이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즉, 기득권층이라고 불리는 양반들의 생각은 조선 말기에 접어들어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폐쇄적이었다고 하는 것인데요. 양반들의 폐쇄적인 생각은 변화되는 세계 정세에 신문물을 받아들아들이지 않았고 이는 결국 일제의 침략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고 합니다.

 

조선 조정 대신들의 무책임

조선이라는 국가는 '태종 이방원'에 의해 왕권이 강화되면서 국왕이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국왕 중심의 국정운영은 조선 조정 대신에게 책임을 묻을 수 있는 명분히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만 보더라도 조선 조정 대신들 중 그 누구도 책임을 진 인물이 존재하지 않고 있습니다. 즉, 그 누구도 국가의 위기에 발벋고 나서는 인물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인데요. 이러한 조선 조정대신들의 무책임과 무관심은 조선이 멸망한 이유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이후 말 뿐인 공무원(조정 대신)들

임진왜란 이후 혼란을 겪은 조선의 조정 대신(공무원)들은 일본의 신무기를 경험하면서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새로운 무기와 문물을 받아들이겠다는 발언을 서슴치 않고 했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조선 조정의 대신들은 말 뿐이었고 실제 신문물과 새로운 무기를 들여오거나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즉, 기득권층들이 앞장서서 신문물과 신무기를 받아들여야하지만 이는 실제 실천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말만 뻔지지르하게 했을 뿐 국가의 발전을 실천하지 않았던 기득권층으로 인해 주변국들에 비해 발전하지 못했던 것도 조선이 망한 이유 중 하나로 꼽고 있다고 합니다.

 

 

고려는 왜 망할수 밖에 없었을까

 

- 고려 내부의 심한 부정부패(조정 대신)들

고려 권문세족 염흥방을 기준으로 많은 권문세족들은 부정부패 했다. 특히나 역사서에 보면 권문세족의 횡포로 인해 백성들은 1평의 땅도 얻지 못했다고 한다. 위화도 회군이 아니었더라도 혁명이 일어나 고려가 멸망했을 것이다.

 

- 사병제도로 인한 중앙정부 세력약화

고려는 귀족들에게 사병을 가질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로 인해 이성계의 경우에도 막강한 사병을 보유하고 있었다. 사병제도로 인해 고려의 중앙정부는 힘을 쓰지 못했다고 알려져 있다. 쉽게 풀이하자면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상실해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 고려 국왕의 영향력

고려의 국왕이었던 우왕은 최영 장군의 영향력 아래 국정을 운영했다. 실제로 우왕의 장인인 최영 장군을 크레 의지했다. 사병제도로 인해 피폐해진 고려는 국왕의 영향력이 제대로 행사 될 수 없었던 국가였다.

 

- 요동 정벌이라는 명분 없는 전쟁

최영 장군은 요동정벌이라는 무책임한 전쟁을 추진했다. 이로 인해 위화도 회군이라는 혁명이 일어났고 결국 개경이 함락 당하면서 고려도 막바지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국가 운영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 고려의 입장에서 대군을 소집하여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자살행위와 마찬가지 경우였다.

 

- 통제가 불가능한 권문세족

역사 드라마를 보면 이인임이라는 고려말의 최고 권력자를 알것이다. 이인임과 더불어 염흥방 세력들은 통제가 불가능했다. 이들을 통제하지 못하게 되었을 경우 백성들이 너무나 심한 고통을 받기 때문에 고려가 시기적으로 멸망의 길로 들어서지않을수밖에 없었다.

 

 

고려가망한 이유는?

 

고려가 망한 이유를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해서

라고 한다면 너무나 어이없는 답이겠죠?

 

교과서에는 고려가 망한 이유는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멸망했다고 하죠

 

하지만, 외세의 침략이 있으면 나라가 망할까요?

 

고려는 원나라의 침입이 있었고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있었죠

 

그래도 이후 100년이상 나라를 지속시켰죠

그럼 고려가 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우선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는

무인들의 100년 집권시기인 무신정변이 있었죠

 

정중부 이의방이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잡고

이후 최충헌 최우까지 100년동안 무인들이

나라를 다스리고 왕은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죠

 

이후 몽골이 중국대륙을 지배하고 원나라가 생기면서

고려에서는 무인정권이 끝이나고 원나라의 힘을 얻은

권문세족들이 생기기 시작했죠

 

이후 고려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 지게 되었는데요

그 이유는 고려와 조선의 차이점이 몇가지가 있는데

그중 가장 뚜렷한 것은 바로 벼슬이었는데요

 

조선의 최고벼슬인 삼정승인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은

아들이 과거를 보고 벼슬을 하지 않는한

 

절대로 벼슬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고려에서는 고위 관료들의 아들은 아버지의

벼슬을 물려받는 음서제도가 있었죠

 

그래서 빈익부 부익부 현상을 가속화 되었죠

있는 귀족들은 더욱 부를 누리고 백성들은

귀족들에게 세금을 내야하고

 

결국 도망을 가거나 아무리 노력을 해도

더이상 생활이 나아지지 않는 사회였죠

 

 

 

그래서 농민들은 소작농이 되어버리고

고려라는 사회는 1%의 귀족과 99%의 소작농이

되어버린 전형적인 멸망 직전의 사회구조였죠

 

이때 새롭게 등장한 인물이 있었는데

신돈과 신흥사대부 또는 신진 사대부였죠

 

신돈은 원나라에 육학을 다녀오고 공민왕의

총애를 받으면서 고려 국정을 다스리는데

 

신돈은 백성들에게 빼앗은 땅은 돌려주고

땅을 팔아 노비가 된 양민들은 다시 양민으로 복원시키라는

법령을 발표하게 되죠

 

이렇게 된다면 백성들은 좋아지고 귀족들은 힘이 없어지면서

자연적으로 왕권도 강화되는 일이었지만,

 

귀족들은 공민왕을 설득해 신돈을 처형하게 만들죠

이후 신진사대부의 대표인물인 이성계와 정도전은

 

고려라는 나라를 없애버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로 합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행동했던 일은 바로 토지대장을 태워버린 일이었죠

 

결국 농업국가에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토지인 만큼 토지제도가 제대로 되지 않아

나라의 기강이 흔들리고 결국 망하게 되는 것이었죠

 

그리고 이성계가 실권을 잡자마자 실시한 제도가

바로 토지제도인 과전법이었습니다.

 

즉 나라의 멸망은 토지와 관계가 있던 것이었습니다.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 이유가 된 조세제도

소득이 있는 일국(一國)의 국민이라면 세금을 납부할 의무를 지닌다. 물건을 구매할 때 세금을 내야 하고, 재물이나 재산을 취득할 때도 세금이 부과된다. 이뿐만이 아니다. 과거 일부 국가에서는 주택에 설치된 창문의 개수, 사람이 기르는 수염, 집에서 키우는 가축(소)이 내뿜는 방귀에 대해서도 세금을 징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쯤 되면 일상의 모든 것이 세금과 관련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처럼 광범위한 국민의 활동에 대해 정부가 세금을 부과하는 이유는 정부가 지닌 고유한 기능을 수행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다. 즉, 세금은 정부가 나라의 경제를 관장하고, 안보를 수호하며, 국민이 필요로 하는 것을 이루는 데 수단이자 재원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세금은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고 국가를 유지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요소다. 하지만 이는 세금제도의 운용이 문란하고 조세 징수의 형평이 붕괴되면 국가라 할지라도 멸망할 수 있음을 역설적으로 의미하기도 한다.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고려(高麗) 왕조다.

 

918년 왕건(王建)이 후삼국을 통일해 건국한 고려 왕조는 그 후 400여년간 한반도의 주인으로 자리잡았으나 이성계(李成桂)로 대표되는 혁명세력에 의해 1392년 조선에 그 자리를 내주게 된다. 소위 여말선초(麗末鮮初: 고려 말 조선 초)로 불리는 격동의 왕조교체기에 그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 바로 부패한 세금제도였다. 농업사회였던 고려시대 후기 백성들은 농사지어 거둔 곡식(소출)을 땅주인인 지주와 나눠 갖고 그 일부를 국가에 세금으로 납부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교통과 유통이 발달하지 않아 중앙정부에 직접 소출을 납부하는 것이 사실상 어려웠고, 정부 역시 소출량을 정확히 측정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다.

 

이에 정부는 벼슬아치들에게 수조권(收租權)을 주어 조세, 즉 곡식을 거둘 권리를 부여했고, 백성들은 이들에게 소출을 납부함으로써 정부에 내야 할 세금을 대신할 수 있었다. 이때 소출이 중앙정부에 납부되는 땅을 공전(公田)이라 하였고, 벼슬아치들에게 납부되면 그 땅을 사전(私田)이라 불렀다.

 

고려 말의 이런 세금제도는 일견 당시의 상황을 고려한 합리적 시스템으로 생각될지 모른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시스템은 합리적이었을지 모르지만 수조 권한이 남용돼 문란하게 운용됐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당시 관리들의 수조권은 관직에서 물러나면 국가에 반납하는 게 원칙이었다.

 

하지만 퇴직 후에도 관리들은 갖은 방법을 동원해 수조권을 유지하려 했고 심지어는 자식 세대로까지 세습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는 퇴직으로 공석이 된 자리에 새로운 관리를 계속 임명했고 그들에게도 당연히 수조권이 부여됐다. 상황이 이러자 하나의 땅에서 소출을 받는 관리가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이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를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농토를 버리고 하는 일 없이 떠돌아다니거나 직업을 아예 바꾸는 일도 생겨났고, 심하면 산으로 들어가 도적이 되기도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고려 말 지배세력을 가리켜 흔히 권문세족(權門勢族)이라 하는데, 이들은 수탈과 겸병을 통해 토지를 불법적으로 획득해나갔다. 종국에는 이들이 소유한 토지의 규모가 실로 어마어마해 그 경계가 논과 밭이 아닌 산과 강으로 구분해야 했을 정도였다. 이로 인해 고려 왕조의 곳간이 텅텅 비게 된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이고, 소출이 근간이 되는 국가 재정 역시 부실화됐음은 불을 보듯 뻔하다.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과거에도 역시 치국(治國)의 근본은 백성의 경제 문제를 해결해주는 데서 비롯된다. 하지만 고려 말 당시 백성들은 송곳조차 꽂을 곳 없는 작은 땅에서 거둔 소출로는 수조권을 채우기에 급급했고, 중앙정부는 재정이 바닥나 새로운 관리조차 임명하기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백성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등장한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이다. 조선 건국의 일등 개국공신인 정도전은 이성계와 함께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꿈꿨다. 그 첫걸음으로 정도전이 주목한 것이 바로 토지제도의 개혁이다. 당초 그가 목표로 한 토지제도는 ‘계민수전(計民授田)’을 통한 ‘정전제(井田制)’였다.

 

여기서 계민수전이란 말 그대로 백성을 수를 세어 농지를 균등하게 배분하는 것이고, 정전제란 고대 중국의 토지제도로 농토를 우물정(井) 자 모형으로 9등분한 뒤 외곽 토지는 8명의 개인에게 각각 나눠주고 중앙 토지는 이들에게 공동 경작하도록 하는 방식을 말한다. 이렇게 하면 백성들은 개인의 땅에서 나는 곡식으로 생활을 이어갈 수 있고, 세금은 중앙의 토지를 공동 경작해 거둔 곡식으로 낼 수 있는 것이다. 정도전은 당시만 해도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이런 토지개혁을 위해 기존의 토지대장을 불사르고 새로이 전국의 토지를 조사하는 사업을 시행했다.

 

이를 통해 그가 바라던 것은 전국의 사전을 폐지하고 모든 토지를 공전화, 즉 국가의 소유로 이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계민수전과 정전제는 현실화되지 못했다. 막강한 정치권력을 손에 쥐고 있던 권문세족이 자신들의 경제권을 앗아가려는 정도전의 의도에 강력히 반발했기 때문이다. 대신 당시 정도전과 함께 이성계의 휘하에 있던 조준(趙浚)이 대안으로 제시한 과전법(科田法)이 시행됐다.

 

1391년 반포된 과전법은 백성에게서 소출을 받을 수 있는 수조권을 직급에 따라 관리들에게 나누어주는 제도를 말한다. 하지만 이런 토지의 범위를 경기도 땅으로 국한했고 나머지 지역의 토지는 모두 정부가 소출을 거두는 국가의 소유로 뒀다. 백성들이 납부하는 소출의 양도 수확량의 1할(10%)로 제한했으며 수조권을 가진 관리 역시 백성에게서 받은 소출의 일부를 세금 형태로 다시 국가에 납부하도록 했다.

 

과전법은 비록 정도전이 이상향으로 삼았던 토지제도의 모습과는 다르지만 당시로써는 획기적인 토지개혁 조치였고 결국에는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사전이 공전화되면서 권문세족의 재정적 기반이 쇠약해진 반면 옛 체제에 반대하던 신흥무장세력과 신진사대부의 경제력은 강화됐기 때문이다.

 

이성계 일당이 불합리한 소출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된 백성의 민심을 얻게 된 것도 과전법 시행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결국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 이 같은 커다란 역사의 흐름 이면에 바로 세금이라는 경제 이야기가 숨어 있는 것이다.

 

신라는 왜 망할수 밖에 없었을까

 

신라 하대 혹은 말기는 잦은 왕위쟁탈전으로 왕권이 불안해진 시기입니다. 농민반란도 일어나고 각지에서 호족이라는 새로운 정치세력, 지방세력이 성장하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골품제라는 신분제의 모순도 심화되어 6두품이라는 중간지배층의 이반도 생겨났습니다.조세징수가 어려워져 세금독촉이 일어나고 이에 저항하는 농민반란도 일어났습니다. 즉 총체적 사회모순, 정치모순의 심화가 신라 붕괴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통일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 투항해 흡수되는 과정을 통해서 일어났으며, 드라마틱한 사건으로 붕괴된 것은 아닙니다.

지방호족들이 새로운 나라를 만들었는데, 궁예의 후고구려, 견훤의 후백제가 통일신라와 함께 후삼국시대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견훤은 반신라정책으로 일관하고 신라 궁을 침탈하고 겁탈하는 등 모욕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후백제와 달리 궁예를 몰아낸 후 왕건은 친신라정책을 펼쳐 신라를 군사적으로 지원했는데 이때 왕건의 목숨도 위험했던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후고구려에 신라 왕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했으며, 견훤의 후백제는 고립되었으며 결국 고려에 의해 통일이 이루어집니다.

 

 

천년왕조 신라, 중앙-지방 대립 때문 멸망

 

 

지금까지 신라멸망의 원인에 대해서는 > 왕실,귀족 등 지배계급의 과다한 사치 ....>불교의 폐해...>와도의편재...>토지제도문란...>고구려,백제 유민 불만 증가...>오랜 평화로 인한 공동목표 상실.....>수도 천도의 좌절등이 있었다 그러나 천년 왕조(BC 57 ~ AD 935)의 멸망은 중앙과 지방의 대립이 궁극적인 원인일수 있다.

 

 

 

충북대 신호철 교수 논문서 주장

이밖에 불교 폐해론의 경우 불교가 신라 멸망에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 상당부분 인정되지만, 정작 그 사상적 내용에 있어서는 학자들마다 현격한 차이점을 보이는 등 모순된 모습을 노정하고 있다.

 

이에 대해 당시 중앙과 지방 세력의 대립을 '궁극적인 원인'이자 '원인 중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그는 두 거대 집단의 대립을 정치, 사회·경제, 사상적인 면에서 고찰·분석했다.

 

그는 정치적인 면에 대해 "귀족분열, 육두품 성장, 군사조직 해이 등으로 인해 지방 호족이 城主, 장군 등을 자처하며 급속히 성장했다"며 "이 과정에서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필연적으로 약화, 천년왕조 멸망의 기운이 싹텃다"고 밝혔다.

 

사회·경제 면에 대해서는 "중앙귀족과 사찰이 대토지를 소유·경영하면서 국가재정이 파탄에 빠지게 된다"며 "이로 인해 농민 등 기층민 몰락, 유민 증가, 호족 세력의 독립화 현상이 일어나면서 신라는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됐다"고 밝혔다.

 

사상 면에 대해서는 "신라 하대로 갈수록 중앙 지배층은 교학불교에 관심을 가지나 지방에서는 선종과 풍수지리설을 더 선호하게 된다"며 "여기서 국가 통합이 아닌 국가 분열의 모습이 나타난다"고 밝혔다.

 

신 교수는 "당시 사회 역학적인 주체는 중앙정부, 호족, 농민 등이나 이들의 관계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고 있다"며 "따라서 앞으로 중앙정부와 호족, 호족과 농민, 농민과 중앙정부 역학 관계에 좀더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압축된 결론으로 "당시 농민들이 칭제건원, 칭왕을 거론하지 않은 것으로 봐 지방호족 세력과 중앙정부의 갈등이 신라 멸망의 주요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며 "지방호족이 중앙정부에 충성을 하지 않은데는 여왕과 박씨왕 등장도 일조를 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 용어설명

 

☞신라 호족 : 당시 신분제도인 골품제도 밖에 존재했던 계층으로 지방 토호 출신이나 중앙에서 낙향한 육두품 출신들로 구성됐다. 이들은 중앙 정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틈을 타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에서 경제력은 물론이고 군사력까지 장악했다.

 

☞육두품 : 신라 중앙귀족의 한 축으로, 진골 다음에 위치하고 있다. 이들은 진골간 왕위 다툼전이 벌어지자 골품제를 비판하고 반신리적인 입장을 취했다. 고려가 건국 되면서 당시 관료문화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백제 신라 전쟁 양상에 대한 고찰을 통한 백제멸망의 원인 재검토

 

I. 머리말

:

II. 7세기 전반 백제-신라 전쟁 양상

 

III. 백제의 외교적 실책과 국내의 정치적

분열 여부에 대한 검토

 

IV. 맺음말

 

 

서기 660년 백제의 멸망은 동아시아 역사에 큰 파장을 몰고 온 사건이었다. 따라서 어떠한 과정을 통하여 백제가 멸망에 까지 이르게 되었느냐는 문제도 중요한 관심사다. 그래서 백제의 멸망을 직접적으로 몰고 온 두 세력 중 하나였던 신라와의 관계가 주목된다. 특히 백제가 멸망한 시기인 660년 이전 백제와 신라의 분쟁(전쟁) 양상이 어떠한 흐름을 보이고 있었는지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양상잉 명확하게 규명되어야만 이어지는 사건들도 보다 정확하게 복원해 볼 수 있지만 대부분의 기존 연구에서 그 시각은 경직되어 있는 듯 하다. 기존 연구에서는 백제가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압박해오는 신라의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하여 국력을 소진한데다가 당과의 외교를 안아하게 처리하여 멸망의 빌미를 제공했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시각은 당시 백제 내부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는 방향으로 이어진다. 그 결과 대부분의 연구자는 물론, 일반인까지 백제는 내부분열을 극복하지 못하여 멸망에 이르고 말았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것이 면밀한 사료 검토를 통하여 내려진 결론이 아니다. 7세기 전반 백제--신라 전쟁 양상을 보면 오히려 백제가 신라를 압박하며 위기로 몰아넣고 있던 양상이었으며 554년 관산성 전투 이래로 이러한 흐름은 유지되고 있었다.

 

 

백제의 외교가 안이했다는 주장도 의심스럽다. 백제는 나름대로 당의 압력에 맞추어 신라에 대한 압박 수위를 조절하고 있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최소한 외교를 ' 안이하게 ' 했다는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

 

백제가 국내정치의 분열로 파국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시각도 의문이 많았다. 사택지적비나 임자의 간첩행위 등은 관련 사료에 직접적으로 나타나지도 않은 내용을 연구자들이 임의로 과장한 내용이 대부부분이다. 이렇게 보면 백제 내부의 정치가 심각한 균열을 보이고 있었다는 시각 역시 확실한 근거를 바탕으로 한것은 아니다. 사료에 나타나는 백제의 분열상에 대한 서술은 침략행위를 정당화 시키려는 의도나 당시 풍조에서 나라가 망한 원인을 지배층의 도의적 타랄게서 찾는 일반적인 요소를 지목해 놓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세 연구자들은 이를 당시 백제 국내 정치상황을 그대로 묘사한 내용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연구자의 편견에 의하여 일반적인요소가 백제에만 적용되는 특별한 요인인 것처럼 둔갑을 해버린 것이다.

 

당시 백제--신라 전쟁 사료와 당과의 외교 관계로 볼때 사료의 왜곡해석과 과장까지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백제 멸망의 원인을 신라의 압박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유발된 외교의 실책과 백제 내부의 분열에서 찾는 기존의 시각은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기존 연구 대부분은 국가멸망의 원인을 1차적으로 지배층의 도덕적 타락에서 찾는 전근대 사회 사관들의 편견으로 지목된 원인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사료에 나타나지도 않는 상황까지 만들어 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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