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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틴 제국의 역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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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틴 제국의 역사.....................!!!

기술사 K 2024. 10. 30.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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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rologue>

세계사는 지금의 세상을 이해하는 가장'쓸모 있는 학문'이자 재미있는 이야기의 보고(寶庫)다.이런 시기에 세계사 흐름에 더없이 중요한 역할을 해내고 분기점을 마련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유럽 중심의 세계사에 가려져 있던 장대한 문명, 동서양이 충돌하는 문명의 용광로에 세운 천년 제국을 다룬 '비잔티움의 역사'가 출간됐다.

 

비잔티움 제국은 1천 년의 시간 동안 동서양이 만나는 접점에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동서양이 이후 서로 다른 길을 걸었기 때문에 역사 속에서 쉽게 간과되곤 한다. 또한 근·현대의 정치적·경제적 발달에 기반한 서유럽 중심의 역사적 시각으로 인해 제국의 시간과 공간은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이 책은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고정관념에 도전한다. 논쟁적인 질문을 던지며 비잔티움 역사의 권위자로 평가받는 저자는 기존의 비잔티움 역사서들이 주로 정치·군사 사건을 다루는 것과는 달리 사회·경제·문화까지 동등한 비중으로 다룸으로써, 고대와 근대 세계를 연결한 이 제국의 역사가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알려준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나를 감탄하게 만드는 것은 비잔티움 제국이 어떻게 나라·언어·신앙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받아들였는지, 어떻게 거대한 위기 속에서 적응하고 살아 남았는지, 한쪽 발은 고대에 두고 그 시절의 책·예술·문화를 어떻게 그리스도교 제국의 취향과 감성에 맞게 재창조했는지 하는 것들이다."

 

그리스도 세계의 정점이었던 천년 제국의 탄생, 생존, 부활, 그리고 전 그리스도교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과 제국 몰락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과거를 이해하는 것은 물론, 21세기 지정학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가 될 것이다.

 

이야기는'비잔티움'이라는 이름에서부터 시작된다.

게르만족의 대이동과 내부 분열로 395년 로마제국은 동로마·서로마로 분할되는데, 비잔티움 제국은 그 동로마 제국을 가리킨다.

비잔티움은 역사상 가장 인상적인 제국이다. 비잔티움에 수도를 둔 324년부터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하는 1453년까지, 비잔티움 제국은 문학·예술·신학·법·학문의 중심지였다.

 

최초의 그리스도교 황제로 그리스도인에게 자유를 천명한 콘스탄티누스 1세, 근대법 정신의 원류가 된 '로마법 대전'을 편찬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문맹이었지만 단독 황제가 되어 군사적 업적으로 중흥을 이끈 바실리오스 1세……. 야심 찬 황제와 그를 둘러싼 영웅들은 호시탐탐 제국을 노리는 이민족 국가의 침략 속에서도 1천 년을 버텼다. 또한 비잔티움은 세계의 온갖 문화들을 한곳에 들이부은 용광로와 같았다. 다양한 인종의 상인들이 비잔티움으로 몰려들었고, 그 속에서 다채롭고 역동적인 문화가 융성했다. 이 책은 고급스러우면서도 비천하고, 진실하면서도 모순에 찬 비잔티움 제국의 실체를 생생히 담아냈다.

 

제국의 방대하고도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읽기 쉬운 연대순으로 친절하게 전개된다. 풍부한 사료와 기록을 바탕으로 한 많은 역사 속 인물들에 관한 다채로운 해석이 담겨 있고, 그에 따른 정치·종교·경제·사회·문화의 생생한 풍경과 놀라운 면모들이 하나하나 모습을 드러낸다. 저자의 시선은 냉철하고 객관적이다.

 

부록 '비잔티움 세계의 이민족'은 비잔티움 제국을 둘러싼 시대의 역학 관계에 대한 이해를 도와줄 뿐만 아니라, 파편적으로 알고 있었던 세계사를 다시 한번 연결해 준다. 또한 국내 독자들이 좀 더 쉽고 빠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국어판에서는 책 말미에 〈교황·총대주교·세계 공의회·황제 목록〉을 실었다.

 

마지막 제9장에서는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된 다음 날부터 오늘날까지의 이야기를 다루며, 14세기의 학자이자 정치가 테오도로스 메토히티스의 말을 끝으로 긴 여정을 마친다.

"모든 제국은 태어나고, 꽃을 피우고, 쇠퇴하고, 죽었다.

 

 

Byzantine Empire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에 약 1,000년 동안 존속했던 동로마 제국.

 

 

비잔틴 제국이라는 이름은 유스티니아누스 왕조가 지중해 탈환을 위해 벌였던 게르만족 세력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610년 이후부터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팔라이올로구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가 퇴위한 1453년까지를 일컫는 중세 그리스의 동로마 문화권을 의미한다. 그러나 동로마인들은 자신들의 영역을 신의 은총과 영원한 로마의 위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그리스도교 국가라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어서 스스로를 계속해서 '로마인'이라 불렀다. 비잔티움은 원래 고대 그리스가 세운 식민지였다. 이 지역은 유럽과 소아시아의 경계선에 있었고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324~337 재위)가 330년에 이곳을 '새로운 로마'로 정하고 이를 콘스탄티노플이라 명명한 후 수도를 옮겨온 뒤부터 동로마라는 새로운 영역의 중심이 되기 시작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죽을 때(395) 제국을 양분하여 동로마를 큰아들 아르카디우스, 서로마를 작은 아들 호노리우스로 하여금 각각 통치하게 함으로써 동서 로마의 분리는 결정적인 사실이 되었다.

 

비잔틴 제국은 제도 일반에서는 로마적이지만 주민·언어·문화면에서는 그리스적이었고 콘스탄티노플은 일찍이 로마 제국이 완수한 적이 없었던 전략상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것이 그리스를 중심으로 소아시아와 이탈리아 해안의 여러 섬들을 포함하여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 조직을 갖추고 그리스도교와 동방적 색채를 포함한 군주국가로서 완전히 성립된 것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의 과도기를 거쳐 헤라클리우스 황제(610~641 재위) 때였다. 이후 콘스탄티노플은 행정과 학문에서 새로운 중심이 되었고 제국의 문화는 고전적 전통 및 중세 가톨릭 유럽과 소아시아의 이교문화의 교차 지점으로서의 특성을 가지게 되었다. 비잔틴과 게르만족의 관계는 반드시 적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야만족에 대해서는 세례만 인정하면 개방했고, 비잔틴 역시 문화의 기원이 다른 문화들인 슬라브·아랍·셈·투르크 등의 문화와 끊임없이 접촉했다. 그러므로 비잔틴 사회는 초기부터 사회적·문화적으로 유동성과 수용력이 대단히 큰 제국이었음이 분명하다. 비잔틴의 사회 구조는 서유럽과는 극히 다른 유형에 속하며, 이는 역사가들의 흥미를 끌어왔다. 또 12세기까지 지중해 교역의 중심세력으로서 아랍인과 경쟁을 벌인 역사 역시 중세 서유럽 상업을 부활시킨 문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관건이 된다. 12세기까지 비잔틴 제국은 중세의 국제정치무대에서 가장 막강한 세력이었고 지중해 경제와 신앙·학문·문화의 중심지였으나 이후부터는 지나치게 광범위한 정복지의 영역이 오히려 새로운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여러 종족간의 갈등, 종교적인 분열, 변방의 잦은 침입, 끊임없는 정복전쟁 등은 제국의 재정과 인력에 심각한 부담이 되었다. 결국 행정적 구조가 더이상 정복지에서의 통제력을 확보하지 못하게 되어 제국은 마침내 붕괴 위기를 맞게 되었다.

 

 

로마적·그리스도교적 배경

 

로마적 전통은 비잔틴에게 커다란 유산을 남겨주었다. 라틴어, 화폐제도, 로마군의 국제적 성격, 도시의 수송로, 법률, 지혜로운 인간으로서의 황제의 인간상, 시민적 문화 등이 그것이었다. 이 모든 것은 아우구스투스 이래 지중해 세계의 통일과 번영을 가져다준 원천이었다. 이 전통은 물론 끊임없이 다른 도전을 받곤 했는데, 정복사업은 로마의 막강한 지배하에서도 다양한 배경을 가진 영역들, 지방적 관습과 관행, 이교도 사원, 유대인 장로회,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그리스도교도와 부딪혔고 자급자족적인 영지나 속주 등의 경제적 단위 등은 제국 내의 통일성보다는 원심적 다양성을 추구하며 황제의 통제력을 벗어나려 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혁

 

이 두 황제는 후기 제국을 보다 통일적으로 재조직하기 위해 세습적 황제계승권의 원칙을 세우고 행정을 정규화하기 위해 제국을 4개의 대관구로 나누고 그 하위의 작은 도시에 이르기까지 행정적 관료제 질서를 확립하는 대개혁을 시도했다. 군사와 민간행정을 엄격히 분리해 정치적 내란을 막으면서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를 공인된 신앙으로 허용해 이교도를 통합했다. 통화제의 개혁으로 가격·임금을 통제하고, 보다 안전한 방어조건을 갖춘 동방으로 수도를 옮겼다. 동방은 로마와 달리 집중된 토지, 즉 라티푼디움의 수가 적어서 자영소농이나 도시 납세자가 많았기 때문에 도시 성장이나 원로원들의 군사적·재정적 봉사 능력에 유리했다. 3세기말부터 후기 로마인들의 사회적 유동성은 두드러지게 줄어서 동방에서는 상업경제적으로 활력이 넘쳤다. 로마 제국 말기의 동서 로마의 차이점 중 또다른 중요한 요소는 이민족과의 관계였다. 동·서고트족이 훈족의 추격을 피해 갑자기 4세기 후반에 도나우 강을 넘어왔을 때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변경지(feoderati)를 하사해 융화정책을 쓰려 했다. 이들은 프랑크족·롬바르드족과는 달리 아리우스파로 개종했고 매우 호전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로마의 원로원 귀족제도에 호의를 느끼지 않았다. 그결과 동로마에서 고트족은 대규모나 조직적인 방법으로 정착하지 않고 개별적으로 제국군대조직 속에 충원되는 경향을 띠었다.

 

 

종교적 논쟁

 

6세기부터 동로마 제국에는 종교적인 논쟁이 제국의 통합을 위협할 정도로 가열되었다. 아리우스파의 이단 선언 이래로 2번째의 중요한 이단설은 단성론(Monophysite)이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 등의 신학자들은 성자 예수의 신성만을 강조하고 인성을 부정했다. 이에 반해 안티오크의 네스토리우스파들은 2가지 특성이 분리 병존하는 것으로 보고 오히려 인성을 강조했다. 오랜 논쟁 속에서 콘스탄티노플은 세력이 컸던 단성론을 배척하고 칼케돈 공의회(451)에서 택한 양성론을 지지했다. 단성론자들의 탄핵과 그에 뒤이은 갈등은 정치적·군사적으로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단성론은 이집트·시리아에서 계속 인기가 있었고, 중앙의 지배에 저항했기 때문에 7세기 이슬람의 침입 때까지 황제는 이 지역의 분리주의적 전통과 싸워야 했다. 결국 황제는 서유럽에서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서 동방의 단성론을 소외시키지 않으면서도 서유럽의 정통설을 만족시키는 교회를 형성해야 하는 난관에 봉착했다.

 

 

동로마 제국에서 비잔틴 제국으로(518~717)

 

동로마 제국의 동쪽 경계에서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다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아르메니아의 그리스도교 개종은 조로아스터교의 페르시아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켰고, 이것은 자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활력적인 군사적 팽창을 자극시켰다. 황제는 라지카에서 아라비아 사막까지, 북으로는 크림 반도의 훈족에게 군대를 파견해 승리를 거두었고 도나우 강을 국경으로 삼았다. 그는 다시 서방으로 관심을 돌려 로마와 화해하고 이탈리아를 게르만인 왕보다도 그리스도교 황제의 통치하에 두고자 했다. 또 황제는 콘스탄티노플 내부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완성하고 군주권을 중앙집권화하기 위한 기초를 다지고 하기아 소피아 성당의 건설을 완성시켰다. 533년에는 북아프리카의 반달족을 공격하여 카르타고의 가톨릭교도를 보호했다. 그후 시칠리아의 고트족을 정벌하고 라벤나에 비잔틴의 총독부를 설치했다. 페르시아와 제국의 경쟁관계에서 중요한 요소는 '비단길'의 확보에 관한 문제였다. 중국에서 페르시아를 거치거나 인도양을 거쳐 콘스탄티노플에 이르는 페르시아의 독점권을 붕괴시키기 위해 비잔틴 황제들은 남쪽 에티오피아의 상인들의 교역료를 이용하거나 북쪽 카프카스 흑해 상인들의 교역료를 이용했다. 제국의 활력에 때맞추어 발칸 북방에 새로운 이민족인 남슬라브인·아바르인들이 남하하여 제국으로부터 경제적 이익을 얻고자 했다. 제국의 사방 변경을 수비하기 위해서는 이들을 포섭·융화해 수비대로 복무시키는 정책을 썼지만 잡다한 이들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서로마와는 달리 비잔틴은 외교적인 방법으로 이들을 제도적·문화적으로 포섭하는 기술을 발휘했다. 이에 그리스 정교회의 신앙과 정통 황제의 관료적 권한은 좋은 방편이었다. 6세기 비잔틴 세계에서는 그리스도교의 민중문화가 더욱 발달하고 있었다. 개종을 위한 세례관행 이외에도 각종 미사, 연도 성사, 신앙고백, 성서 이외의 전설·기적, 종교적인 음악·미술, 수도원 성직자들의 생활이나 생애기록 등이 소아시아 지역에서 점차 확산되어 유대교나 동방 이교를 밀어내고 있었다. 또 제국의 대주교들은 제국 내의 행정·군사·사법·외교·상업·복지사업의 기능까지 행함으로써 민중의 일상생활에 깊숙이 침투했다. 단성론과 칼케돈의 정통 교리 사이의 갈등이 해소되지 못한 와중에도 성상(Icon)은 널리 보급되어 민중적 그리스도교 문화의 활력을 나타냈다. 성상은 예수나 성모·성인들의 추상적이고도 단순화된 이미지를 나타낸 것으로 일반대중에게 호소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신플라톤주의 철학과도 관련이 있었다. 이에 의하면 눈으로 볼 수 있는 예수의 이미지를 묵상함으로써 눈으로 볼 수 없는 예수의 본질에 대한 묵상을 불러일으킨다는 가르침이었다. 헤라클리우스의 통치시대에는 다시 시련이 닥쳐왔다. 수도 내에서의 왕조간의 암투와 종교적 분리주의 경향의 강화 속에서 영토가 줄어들고 상업과 도시의 활동이 위축되었다. 그러나 이 시련 속에서도 왕조는 내부적으로 견고한 지방행정상의 개혁을 실시하고 용병제보다는 농민 보병제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이들에게 군사 보유지를 할당해서 소토지소유자 계층을 증가시키려고 노력했다. 이무렵 동방의 적 페르시아와 아바르족 이외에도 아라비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마호메트가 메디나로 피신해 이슬람 공동체를 설립한 뒤 그의 후계자 칼리프들은 632년부터 대규모의 정복·개종사업을 벌여 페르시아를 격퇴하고 키프로스·로도스·크레타·알렉산드리아를 점령했다. 페르시아와 비잔틴이 그처럼 쉽게 굴복한 것은 첫째, 오랜 전쟁으로 힘이 고갈되어 있었고, 둘째, 아랍 변경지대의 군소 국가에 대한 원조를 소홀히 했으며, 셋째, 비잔틴의 경우는 종교적·왕조적 내분으로 충성심과 통합성이 매우 약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승승장구한 이슬람 세력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면서 특히 우세한 해상 능력을 이용해 지중해 연안 국가들을 먼저 침공했다. 비잔틴은 이때 도나우 강을 넘어오는 북방의 불가리아인과 서유럽 영역에 대한 통제로 힘이 분산되어 아랍인의 진출을 막아낼 수 없었다. 드디어 698년 이슬람 세력은 아프리카의 총독부를 공략하고 아르메니아와 소아시아를 포위해 제국의 양면을 조여들어갔다.

 

 

성상파괴운동(717~867)

 

이사우리아 왕조(717~820)와 아모리아 왕조(820~867) 사이의 약 150년간 비잔틴은 역대 황제들의 성상파괴운동으로 최대의 종교적 내분을 겪었다. 서유럽에서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세속 권위보다 우월한 권위를 행사했지만 비잔틴 제국에서는 황제가 정치적 목적으로 교회를 복종시키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에성상파괴 분쟁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명백한 경계를 그으려는 노력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성상숭배의 관행은 692년 퀴니섹스트 공의회 이래로 더욱 강화되어왔으나 이에 대한 반대이론은 730년 레오 3세(717~741 재위)의 성상파괴칙령에 의해 불붙게 되었다. 성상숭배론자나 성상파괴론자들은 다같이 그리스도교도가 성상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갖지 않으면 번영할 수 없으리라는 신념을 지녔지만 8세기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네스는 신플라톤주의에 입각해서 성상은 신의 상징적 이미지에 지나지 않으며 신은 육화를 통해 인간이 되었기 때문에 이미지 창조는 정당하다고 보았다. 이에 반해 파괴론자들은 일부 이슬람교와 단성론자들의 영향을 받아 일체의 종교적 우상을 거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했다. 이들이 보기에 예수의 육체적 이미지는 신성모독이었다. 이와 동시에 콘스탄티누스 5세는 754년에 광신적 수도원의 박해를 결정하고 성상을 황제 초상화로 대체하려 했다. 그는 수도원과 교회의 권위가 황제와 세속 학문의 세계를 경멸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또한 황제권의 휘하에 봉사하던 온건파 성직자들 역시 수도원의 광신파에게 대립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세속적 봉사와 교육에 의한 훈련을 중시했던 것이다. 이들 군사 및 관료귀족층은 성직귀족층과 대등한 권위를 누리고 싶어했다. 그러나 성상파괴운동은 비잔틴 사회의 인종적·사회적 이면에 보다 더 깊은 종교적 분열을 하나 더 보태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성상파괴운동은 비잔틴과 로마 가톨릭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2세는 레오 3세의 이 박해운동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고 게다가 롬바르드족이 점령한 라벤나와 일리리쿰 지역의 교회재판권을 비잔티움 대주교에게 넘기게 됨으로써 양쪽의 관계는 서먹해졌다. 게다가 교황 스테파누스 2세가 피핀을 서로마 황제로 대관한 일은 '하나의 제국, 하나의 황제' 사상과 대립하기에 이르렀다. 9세기 후반에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경쟁을 부추기는 더욱 심각한 사태가 일어났는데, 그것은 중부 유럽의 슬라브인과 발칸의 불가리아인·러시아인의 개종과 교회 사법권을 둘러싼 문제였다. 포티우스 대주교는 외교수완을 발휘해 비잔틴의 영향력을 넓혔지만 이는 경쟁관계로 치닫던 동·서 교회의 대분열의 조짐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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