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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변방의 흙수저 포르투칼 해양을 지배하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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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변방의 흙수저 포르투칼 해양을 지배하다..!!

기술사 K 2024. 10. 30.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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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15세기 세계패권국가 포르투칼

세계 패권대국의 장은 서기 1500년경에 열렸다.

이유는 신항로의 개척과 그리고 신대륙의 발견이 첫 출발점이다.

이 후 500년 동안 세계 무대를 중심으로 9개 나라 포르투칼,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러시아, 미국이 이 등장하게되는데 이 9개 나라는 경쟁과 침략, 혁명과 패망 피바람의 역사속에서 세계의 패권을 노려왔다.

 

<들어가기........

16세기 이전의 인류는 서로 단절된 독립된 땅에서 살아왔다.

어느 누구도 세계를 정확하게 알지 못했으며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에 살고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왔다.

이 때 중국은 명나라 시대였으며, 아랍과 인도 상인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대륙과 무역거래를 하고 있었으며 활동 범위는 인도양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당시 유럽인이 인식한 대륙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로 알고 있었으며, 모두 기독교를 신봉하는 왕이 통치하는 왕정시대였다.

 

14세기 부터 유럽인이 작성하기 시작한 세계지도는 이 싯점부터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하여 마침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지도가 완성되었다.

신대륙의 발견으로 분리되었던 세계는 연결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나라간 경쟁이 치열해지고 문화의 교류가 시작 되었다.

놀라운 것은 당시 포르투칼과 스페인 두나라는 당시 쟁쟁하던 경제문화의 중심 유럽대륙에서 서남단에 위치한 두개의 작은나라였다

그러나 500년전 그들은 전세계를 호령하는 맹주가 되었다.

그들의 세력은 유럽과 아시아를 넘어 아프리카까지 펼쳐졌다.

리베리아 반도의 작은나라인 포르투칼과 스페인이 한세기를 걸쳐 바다를 정복하고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그 힘은 바로 해양을 정복하는데 있었다.

 

10만 평방미터의 작은 땅 자원이 없는 포르투칼은 바다 대서양으로 눈을 돌려 그곳에서 답을 찾기 시작했다.

대서양을 향한 신항로 개척은 오랫동안 빈곤하고 낙후된 삶을 살았던 포르투칼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포르투칼 왕 주완 1세의 셋째 아들인 엔리케(1394~1460) 왕자의 지휘아래 신 항로 개척의 긴여정이 시작되었다.

당시 유럽은 중세를 지나 르네상스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고 과학과 문화와 사상은 유럽 하늘을 희망으로 덮고 있었을 때였다.

 

항로 개척의 동기는 음식물에 들어가는 향신료로 주 원료인 작은 알갱이 후추가 원인이었다.

14~15세기 당시는 대부분의 식품을 저장할떄 향신료에 의존 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냉장고가 없어 유럽에서는 향신료의 수요가 급증했다.

가격이 폭증하여 고가로 거래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러나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었던 향신료 무역은 급성장한 오스만 제국이 무역로를 단절시켜 아라비안 상인들이 독점하고 있었다.

유럽은 이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종교와 상업적인 무역활동 등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였다.

그러나 유럽은 육지에서 전쟁에 패하게 되고 바닷길을 통해서 향신료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포르투칼 최남단에 위치한 작은 어촌마을 황량한 서글레스에서 엔리케 왕자의 지원으로 국립 항해학교가 설립되어지고 항해를 위한 천문대와 도서관이 지어졌다.

중국의 작은 나침판을 개선하고, 당시 풍력으로 달리던 범선을 개선하여 보다 빨리 항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수학자들로 구성한 위원회를 발족시켜 항해를 위한 항해 기술력을 발전시켜 나갔다.

오랫동안의 연구를 통한 학문적 이론이 실제 항해에 적용되면서 궁금증과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대서양은 점차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포르투칼 항해자들은 남쪽을 향해 항해를 시작했다.

항해가 계속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서기 1434년 엔리케 왕좌의 지휘아래 유럽대륙의 땅끝 카르보다카를 출발한 포르투칼의 선박은 세계의 끝으로 알고있었던 서아프리카의 보자도르곶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계속 아프리카의 서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진출해 아프리카의 황금과 상아, 후추를 리스본으로 가져왔다.

국고는 나날이 늘어났고, 반면 유럽의 국가들은 중세에 폐쇄적인 환경속에서 끊임없는 암투를 벌이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통일을 이루지 못한체 전생속에 있었고 독일의 주변국가들은 먼나라와 친교를 맺고 가까운 나라들을 공격하는 원교근공 게임을 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전통무역이 가져다주는 마지막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었고, 포르투칼의 이웃 스페인은 여전히 자국의 독립을 위해 전쟁을 벌이는 중이었다.

1460년 포르투칼 주완2세때 아프리카 희망봉을 발견하게 되면서 아시아로 나가는 꿈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새로운 항로가 열리는 시대를 맞이하여 이윤이 높은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는 길을 열게되었다.

포르투칼 항해도

해양을 장악한 포르투칼은 한때 세계 패권국가로 영화를 누렸다.

하지만 1세기도 넘기지 못하고 가까운 스페인으로 패권국가의 지위를 넘기게 된다

 

 

 

컬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지 5년후인 1497년, 포르투갈의 해양탐험가 바스쿠 다가마(Vasco da Gama)가 4척의 선대에 170명의 선원을 인솔하고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의 컬리컷(Calicut)과 고아(Goa)를 발견하고 되돌아 갔다.

 

그는 1502년에 20척의 배를 이끌고 다시 인도에 건너와 이슬람 순례자를 태운 아시아의 선박을 포획하고 여성과 아이들을 포함한 수백명을 배 안에 태운채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는 캘리컷의 술탄에게 항복을 요구하며 포격했다. 다가마의 선원들은 물건을 팔러온 인도 상인들을 매달아 죽이고 사지를 잘랐다. 그러고도 모자라 사지를 잘라 술탄에게 보내 먹으라고 조롱했다.

 

포르투갈인들의 만행이 이슬람 세계에 전해졌다. 이슬람 지도자들은 더 이상 기독교도들이 아시아의 바다를 넘나들며 만행을 저지르는 것을 묵과할수 없었다. 경쟁 관계에 있던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과 이집트의 맘루크가 모처럼 단합하기로 결의했고, 인도의 구자라트와 캘리컷의 술탄도 연합군을 형성했다.

 

 

 

1509년 2월 3일 디우 해상에서 역사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디우는 인도산 향신료의 수출항이었다. 포르투갈로서는 이 항구를 차지해야 동방 무역에서 큰 이익을 얻을수 있었다.

 

디우 전투(battle of Diu)는 인도양을 두고 동양과 서양의 해양 패권을 다투는 싸움이었다. 이 전투를 계기로 인구 100만명의 포르투갈이 동양의 패자 오스만투르크를 제치고 인도양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서양세력이 동양에 진출하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이 시작되었다.

 

디우항 앞바다의 전투는 싱겁게 끝났다. 전투의 성패를 결정한 것은 전함 수와 병력 수가 아니라, 무기였다.

 

포르투갈 전함에는 무거운 장거리 대포가 탑재되어 있었다. 이에 비해 이슬람 선박은 노를 사용했고, 노를 젖는데 많은 인원이 필요했다. 이슬람측도 총포가 있었지만, 포르투갈의 장거리 대포에는 무기력했다. 이슬람측은 배를 접근해 숫적 우위에 있는 병력을 적선에 올라타 백병전을 벌이는 작전을 폈다. 이에 비해 포르투갈 전함은 배가 접근하기도 전에 대포로 이슬람의 다우선에 포격을 가해 파괴시켰다. 이 무렵 서유럽에서는 전함에서 대포를 발사할 때 엄청난 반동을 흡수하는 기법을 습득했다. 대항해 시대 초기에 서양 선박들은 180m까지 정확하게 포격할수 있었다.

 

이 전투 후에 인도양의 패권은 동양의 이슬람 국가에서 서양의 기독교국가의 손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듬해인 1510년 포르투갈은 인도의 고아를 함락하고, 1511년 말레이시아의 말라카, 1515년, 페르시아만의 호르무즈와 실론 섬을 장악한데 이어 1516년에는 태평양으로 이동해 중국 광둥성의 주강(珠江) 입구에 도달한다. 포르투갈은 곧이어 마카우, 일본 나가사키로 진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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